정보화마을 철원 두루미평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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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의 역사


    두루미평화마을은 정부에서 국방력 강화와 식량증산의 목적에 부합하는 모델인 이스라엘의 기부스 농장을 견학 후 반공정신이 투철한 재향군인 150명을 1967년 2월 가입주 시키므로써 두루미평화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두루미평화마을인 이곳은 옛 철원의 곡창지대로 전쟁 전에는 북한에 속하였으며 평지로써 기름진 땅이었으나 50여년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관계로 거목이 있었고, 휴전선 근방에서 해마다 산불을 놓아 동식물들도 살 수 없는 땅 이었다.

    1967. 3. 10 통제부 골짜기에 재건촌 건립계획에 의거 반공정신이 투철한 향군 150명(철원군 80, 연천군 70명)이 최초 군용천막 생활로 가입주 하였으며, 당시 향군단장은 박응하, 군통제부 단장은 20사단 신현수 준장이었다.
    또, 이곳은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으로 양측이 수없이 많은 지뢰를 매설한 곳이어서 사실상 지뢰로 뒤덮인 땅이었으나 두루미평화마을의 초기 개척 주민들과 군부대 장병이 함께 지뢰를 제거하고 거목을 제거하면서 이룩한 땅이다.

    두루미평화마을의 초기 주민들은 천막생활을 하면서 국수덜냉이(국수를 물에 불린 것)을 먹어가면서 작업하였고 150명이 15개조(각조 10명)로 나누어서 공동으로 개간과 농사를 지었으며, 1968년 8월 30일 입주 후에도 약 3년간은 공동 농사를 지었으며 3년 후 부터는 개인 분배를 시작하여서 입주 후 8년까지 완전 분배를 하였으며 그 후 각 가정이 자체적으로 농사를 지었다. 두루미평화마을 주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한가지씩 해결해 나가면서 현재의 젊은이가 많은 큰 마을을 이룩하였다.

    입주현황

    • 입주년도: 1968년 8월 30일
    • 입주가구: 150가구
    • 지원농기구: 경운기 15대


    시련의 역사

    두루미평화마을의 주민들은 입주 당시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쓰고 입주하면서 20여명이 지뢰밭 사고로 8명의 사망자와 10여명의 부상자가 생겼는데 정부나 군 및 기타 기관에서 어떠한 보상이나 생활보조도 없었으며, 사고를 당한 많은 분들과 주민들의 어려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두루미평화마을 주민 강옥련씨, 신영택씨 등 많은 사람들이 지뢰밭 개간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두루미평화마을의 주민들은 입주 당시 철책이 없고 목책으로 이루어져서 간첩침투가 자주 있었다고 하며, 마을 주민이 신고하여 간첩을 잡은 일도 있다고 할 정도로 간첩침투가 빈번한 지역으로 철책이 생길때까지 대마리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근무를 섰다고 합니다. 입주 초기에는 기반시설의 부족으로 인하여 인력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야 하였으며, 산명호 지류가 없어서 마을 주민들의 보증으로 산명호 지류를 보수하였고, 철분이 많이 함유한 지하수이었기 때문에 물을 다른 곳에서 먹어야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입주 당시 집과 땅 6천평을 정부가 약속하여서 입주하게 되었는데 개간이 끝날 무렵에 땅주인들이 나타나서 법정 소송으로 인하여 마을주민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땅을 잃어버린 경우도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입주 기념일 행사

    • 장 소 : 묘장초등학교 운동장
    • 시 기 : 입주기념일(매년 8월 30일)
    • 문 의 : 033)455-2300

    입주기념일 행사는 두루미평화 마을의 특이성인 입주기념일을 기념해 마을 주민과 관광객이 어우러지는 한마당 행사이다.



    입주기념식은 1968년 8월 30일에 두루미평화마을이 생긴 것을 기념하는 행사로 백마고지전투에서 순국한 순국장병들을 위한 묵념과 마을의 체육대회를 열어 마을 주민들의 단합과 화합을 위한 행사이다. 이 행사로 인접 군부대와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 개척정신과 미래지향적 통일 염원을 다짐하는 행사이다.